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4.19 혁명 (문단 편집) === 의외로 높은 교육 수준 === 물론 오늘날의 교육 수준에 비교할 수 없지만 당시의 [[대한민국/교육열|교육열]]은 사실상 "붐" 에 가까운 것이었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이승만 정부의 국가 총예산의 평균 '''10.5%'''는 교육 관련 지출이었다. 이 외에도 [[국민학교]]([[초등학교]]) [[의무교육]]제가 채택되었으며 또한 빈민층일수록 학구열은 더욱 높았다. 그 이유는 '''교육을 통해 그 누구라도 신분이 상승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한국은 전통적으로 유교적 사고방식에 특히 [[고려]]와 [[조선]] 내내 시행한 [[과거 제도]]의 영향으로 '배운 사람'에 대한 고평가나 존중의 분위기가 있어 왔고 입신양명 등 공부로 인한 성공을 장려하는 등 교육열이 꽤나 높은 국가였다. 하지만 이런 교육열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철저한 통제로 억눌렸다. 자신이 가르치는 교육을 통해 양반이 될 수 있다는 식의 선전이 있었지만 교육의 물적 인프라를 제한하고 교육의 대가로 일제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였다. 물론 구한말의 95%를 상회하는 문맹률과[* 근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당시 조선의 통계에 대해 신뢰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으나 가장 빠른 근대화를 이룬 일본에서조차 현재 남아있는 1890년대 나가노현 통계에서 편지를 작성하는 수준을 기준으로 한 문맹률이 93.2%에 달한다는 기록이 있었다. 글을 깨우치기 위해 서당이라는 제한적인 접근수단밖에 없었던 한국이 딱히 더 높지는 않았을 것이다.] 1920년대까지 보통학교보다 서당에서 글을 깨우치는 사람이 많았던[* 출처는 매년 발행되던 조선총독부 사건통계로, 해당 항목에서 서당이 보통학교에게 추월당한 시기는 1920년대 중반이다.] 현실에 비하면 교육환경이 나빠졌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일제가 본국과 조선 반도를 차별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 이미 본국에서는 1900년대부터 실시해 오던 초등교육에 대한 의무교육을 식민지 조선에서는 1945년 패망할 때까지 실시하지 않았고 학교인프라 확충이나 학비부담 경감과 같은 사안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사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정부는 [[중일전쟁]]이나 [[태평양 전쟁]] 같은 전쟁에 국가 예산의 대부분을 쏟아부었기 때문에 자기 나라도 아닌 식민지 조선을 위한 교육에 예산을 많이 투자할 리가 없었다. 당장 1944년만 해도 일본 정부 예산의 90%가 군사비였다(...) 그나마 서당과 같은 구시대적인 교육기관은 1940년대 기준으로 초등교육기관이 거의 대체하여 50% 정도를 달성하였고 문맹률은 80% 수준까지 떨어졌으나 이는 일본 본토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였다.[* 같은 시기 일본 본토의 초등교육기관 취학률은 90%를 상회하였고 문맹률은 26%에 불과했다.] 최고 교육기관인 대학은 [[경성제국대학]] 딱 하나만을 만들었고 그마저도 입학생의 절반 이상이 일본인들이던 상황.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살던 일본인들은 약 80만 명이었고 조선인들은 2천만 명이었는데 단 하나뿐인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절반 이상이 조선 거주 인구의 5%도 안 되던 일본인들이었다면 조선인들이 교육에 있어서 일본인들에 비해 얼마나 차별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본국에는 수십개가 난립하던 사립대학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본토에서는 도쿄나 오사카 같은 하나의 도시 안에서 대학교 여럿이 들어설 만큼 일본 본토의 교육열은 높았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설립을 전부 불허하고 대학보다 한 단계 낮은 전문학교의 지위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통제하였다. 즉 해방 이후의 이런 상황은 30년 이상 억눌려 왔던 교육열이 힘 풀린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폭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45년에서 1960년까지 학생 수는 3배로 증가했고 [[http://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3276|문맹퇴치 5개년 사업]]을 통해 비[[문해율]]은 1945년 78%에서 1958년 4.1%까지 떨어졌다.[* 이는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여서 1950년대 들면 북한에서 문맹은 거의 퇴치되는 수준까지 다다랐다. (공식적으로 1949년에 문맹이 전부 퇴치되었다고 한다. 물론 신빙성이 있는지 의문이겠지만 그만큼 문맹 퇴치가 빨리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도 논란이 있다.) 다만 북한은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반대파의 싹이 확 잘려 버리는 바람에 이후 학생운동이 꽃을 피우지 못했다.] 그와 함께 초등~중등 교육과정에는 '''민주주의의 정신과 이상'''에 대한 교육이 반복적이고도 일관성 있게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이승만 정부의 원래 의도는 [[반공주의|전혀 다른 것이긴 했다.]] 국제정치적으로는 [[스탈린주의]]가 좁게는 [[북한]], 넓게는 [[소련]]에 이르러 세계를 양분해 첨예한 대립각을 형성하던 시대였기에 한국도 이런 정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대학]]에 진학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매우 강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많은 대학생들이 생겨났다. 1945년 대학생 수는 7819명[* 참고로 현재와 비교하자면 웬만한 대규모 대학의 전체 학생 수가 약 1만 명 정도 된다. 즉, 1945년 당시에는 전국의 대학생 규모가 현재의 1개 대학 학생수만도 못했던 것.]이었는데 1960년에는 9만 7819명으로 '''대학생만 무려 9만 명이 늘었다'''. 통계청 기록에 의하면 대학 재학생 수는 6만 9961명. 오늘날에 비하면 결코 많은 수는 아니지만 당시 한국과 국민소득이 비슷한 다른 [[제3세계]] 국가와 비교하면 확실히 높은 비율이였다. 이렇게 대학생의 수가 늘어난 것 또한 다름아닌 이승만의 교육정책 때문이었다. 당시 1공의 최우선 목표 중 하나가 문맹을 퇴치하고 교육제도를 개선하며 학생 엘리트를 양성한다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가 미국의 원조금으로 미국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학비를 대 줬는데 이에 대해 미국은 '한국은 우리가 밥 사 먹으라고 준 돈으로 뭐하냐'고 혀를 차기도 했다.[* 1957년부터 원조금을 줄이기 시작한 원인 중 하나다.] 이승만은 국방비 다음으로 늘 교육비에 많이 투자해 '''1945년 대비 대학생이 12배나 증가해 동시기 [[영국]]보다 대학입학률이 높았다'''.[* 당연하지만 대학 교육의 질적인 수준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일반 상식과 민주주의에 대한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은 이승만의 독재를 두 눈 뜨고 지켜보진 않았다. 즉, 이승만은 자신을 타도하는 [[자산]]을 키운 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